이란과 미국의 갈등

[대외 관계] 하마스의 배후, 이란과 미국 간 갈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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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시탐탐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선 계속되는 중동 정세와 함께 이란과 미국의 갈등에 대해서 다뤄볼 예정인데요. 특히 최근 들어 예멘의 후티 반군이 바닷길을 장악하면서 생기고 있는 소요와 함께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각각 지원하고 있는 미국과 이란에 대해서 포스팅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한 포스팅에서 많이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전선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단순 두 집단 간의 충돌만 있지는 않은데요.

하마스의 배후에는 이란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란은 자국이 지원하는 무장단체들인 헤즈볼라, 후티 반군, 시리아와 이라크의 민병대 등을 추가적으로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 뉴스 기사들을 보면 이라크 내에 친이란 민병대가 미군을 드론으로 공격하고 미국은 이라크에 공습을 가하는 일이 발생했고, 홍해 지역에서 후티 반군이 민간 선박을 공격하며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저항의 축과 이스라엘, 수면 위로 올라온 그림자 전쟁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간 중동에서는 이란과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자 전쟁이라 함은 정규군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수행하는 직접적인 전쟁이 아니라 증거를 남기지 않고, 잘 노출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수행하는 전쟁을 말합니다. 주로 요인 암살, 드론 공격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드론 공격으로 이란 혁명 수비대의 핵심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솔레이마니가 사망하는 일이 있을 만큼 두 국가 사이엔 치열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이란의 군사 시설을 드론으로 포격한다거나 이란의 주요 핵 과학자를 암살하는 등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하며 이란의 성장을 저지하고 있고 이란도 여기에 맞서고 있는 형국입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전쟁과 미국에 대한 소규모 공습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 사이에 갈등은 어디서 시작했을까요? 이들의 갈등은 195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1950년 초반 이란은 남부는 영국의 자유주의 진영이 북부는 소련이 간접 지배하던 전형적인 냉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양국 갈등의 시작 1950년대

 세계가 냉전의 굴레에 막 들어설 무렵, 중동의 이란에선 석유개발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이란을 사실상 간접 지배한 영국은 여러 이권과 함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통해 석유사업에서도 큰 이익을 보고 있었는데요. 이란 정부는 영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석유회사에서 얻은 이익을 분배하게 되었는데, 회사가 영국 정부에 지불하는 수익세가 이란에 지불하는 로열티와 순익의 두 배에 달할 만큼 불균등하게 분배되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석유를 상당히 많이 생산했는데, 이렇듯 석유 판매로 인한 이득을 대부분 영국이 독차지하자 서방 세력에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란 내 정당들과 국민들 사이에선 석유 국유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란 내에서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란에 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취임하며 석유 국유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 한국 전쟁과 함께 소련과의 확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다른 방법을 고안합니다. 미국과 영국은 군사 개입 대신 이란을 봉쇄하고 모사데크 정부를 축출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당시 미국은 당시 이란 내 친소련 공상주의 정당인 투데당과 모사데크가 어느 정도 연합할 가능성을 보이자 쿠데타를 지지하게 됩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

 미국과 영국은 이란의 석유 수출 항로를 봉쇄하고 이란산 석유를 구매하지 못하도록 제재하였으며 한편으론 이란 군부의 쿠데타를 유도해 모사데크를 축출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이란에 친서방 정권을 앉혔고, 이 정권은 미국과 영국의 의도대로 여성의 참정권 부여, 토지 개혁 등 친서방 정책을 펴게 됩니다.

 당연히 친서방 정책의 특성상 기존의 이슬람 교리와는 맞지 않았고 이란 내 이슬람 민족주의 세력과 충돌하게 됩니다. 여러 차례 시위가 발발했고, 새 정권은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며 당시 큰 지지를 받던 시아파 종교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를 추방하였습니다. 결국 서구화와 근대화에 대한 반발과 부패하고 독재적인 새 정권(팔레비 왕조)에 대한 불만이 터져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발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슬람 종교 세력과 사회주의자들, 세속주의자들 등 기존 정권에 지친 세력들의 주도로 기존 팔레비 왕정 체제가 전복되었고 프랑스로 망명갔던 호메이니가 돌아오면서 이슬람공화국이 완성됩니다. 이처럼,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면서 이란은 기존과는 다른 정치 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과거의 독재정과는 다르게 이슬람 법학자들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슬람법학자 통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정치 및 문화적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테헤란 인질사건

 이렇게 기존 팔레비 왕조가 전복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기존에 쌓였던 감정이 1979년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분출되면서 미국과 이란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 1979년 11월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입니다. 1979년 11월 주이란 미국 대사관에서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반미 감정이 격한 시기에 정부 전복 후 이집트로 도망친 팔레비 2세의 입국을 미국이 허용하고 이란의 송환 요청을 거절하면서 폭발하게 됩니다.

 당시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에 시민들이 더해져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에 의도를 넘어 444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대사관을 점거하게 되었고 이에 미국은 보복을 선언하고 대이란 국교 단절 및 무역 금지, 120억 상당의 이란 자산 동결 등의 경제 제재 조치를 시행합니다. 문제는 1980년 벌어진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한 것에 있습니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이 자국으로 퍼지는 것에 대한 우려와 함께 샤트알아랍 수로에 대한 국경 분쟁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이슬람 혁명 후 혼란스러웠던 이란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때 미국과 사우디, UAE 같은 친미국가들은 이라크에 군사 정보와 함께 재정 지원을 하였고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의 전쟁이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미국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란을 제소하여 이란의 국가책임을 인정받게 됩니다(1980, 테헤란 인질사건). 전쟁 중 기나긴 인질 사건은 이란의 내정 불개입과 제재 철회 등에 합의하는 ‘알제리 협정‘을 맺으며 1981년 1월 20일 사태가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이란 내에서는 미국이 이라크를 부추겨 이란을 침공했다는 인식과 함께 반미 주의 감정이 계속해서 심해집니다.

 거기에 레이건 정부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이란 제재법(Iran Sanctions Act)을 만들어 무기금수조치 및 자금 대출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였고, 이란 또한 레바논 헤즈볼라를 이용한 주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에 대한 자상 폭탄 테러, 미 해병대 평화유지권 테러 등을 자행합니다. 미국은 이에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키는 등 두 국가의 관계는 회복되기 힘든 수준에 다다릅니다.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와 파기

2000년대 들어서는 부쉬 대통령의 악의 축 선언과 2002년 이란의 핵 개발 계획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더욱 심각해집니다. 당시 이란이 나탄즈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알리지 않고 우라늄 농축시설과 아르크 중수로를 건설한다는 폭로가 있었고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협상을 통해 이란의 핵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초기 미국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독일, 프랑스, 영국은 테헤란 선언을 통해 이란이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중단하는 대신 이란의 핵 권리를 인정하고 만족스러운 보장 방법을 논의하기로 합의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라늄 농축 허용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였고 2005년 이란 내 보수 강경파 정부의 취임과 함께 이란의 핵 개발이 본격화됩니다.

이란이 우라늄 농축의 중단을 요구하는 안보리 결의 1696호를 준수하지 않자 안보리 결의 1737호에 의해 이란에 또 다른 제재를 부과하게 됩니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된 제재 속에서 미국에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고 이란에도 중도, 개혁파이자 실용주의적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핵 문제 해결 논의가 시작됩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과 안보리 상임이사국(P5)과 이란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 합의합니다. 본 합의로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제재 해제를 통해 지지부진했던 경제 부흥을, 오바마 대통령은 그 동안 골치 아팠던 중동에서의 유의미한 결과 도출과 함께 중국 견제를 위해 더욱 원활한 아시아 재균형정책(Rebalancing to Asia)을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JCPOA의 주된 내용은 이란이 핵에 대한 무기화를 포기하고 오직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만 핵프로그램 및 핵 에너지 개발을 하고 이란의 핵 활동에 대해 IAEA가 검증하면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어주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중농축 우라늄 비축분 제거 및 저농축 우라늄 비축분을 감축하여 300kg만 보유하는 것, 그리고 우라늄 농축 비율 제한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농축활동 시설 제한, 원심분리기 보유수 제한 등의 조치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과의 핵협정이 불완전하고 이란에 영구적 핵 저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일방적으로 JCPOA를 파기해 버립니다. 또한 이와 함께,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재개하면서 양국 관계는 또 다시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 같은 역내 친미 국가들의 압력과 더불어 오바마 대통령의 업적을 파괴하려는 의도로 JCPOA를 파괴한 것으로 보이고 이후에는 카셈 솔레이마니를 암살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 이후

 이후에도 계속되는 이란의 미국 유조선 피습, 억류 그리고 드론 격추 등이 이어졌고 이라크의 키타이브 헤즈볼라를 이용해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그림자 전쟁을 꾸준히 수행해 옵니다. 이처럼, 양국 관계의 지속적인 경색 국면 속에서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국민 일보

이번에도 역시 친이란 무장 단체들, 일명 시아파 초승달 벨트를 이용해 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후티 반군을 이용해 바닷길에서도 마찰을 빚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수에즈 운하로 통하는 수로를 점거한 만큼 단기적으로 크게 유가가 상승하거나 에너지 부족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물류비 상승 및 유가 상승의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전쟁 이후 러시아가 유럽으로 통하는 가스관을 막으면서 유럽국가들은 에너지를 중동으로부터 많이 들여오는 만큼 현재의 여유분이 소모된다면 에너지 문제가 붉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늘은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핵심 지지 세력들의 갈등에 대해서 풀어보았는데요 😊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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