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선박에 물대포 쏘는 일본 자위대

[국제 분쟁]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 열도 분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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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호시탐탐입니다. 오늘은 일본과 중국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지역인 동중국해 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동중국해 분쟁은 중국명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열도에서 일어나는 영유권 분쟁을 말합니다.

센카쿠 열도 분쟁

 다들 아시다시피 중국은 겉으로는 국내 성장을 위한 평화로운 대외 환경을 원하며 평화로운 부상을 주장하지만 뒤로는 막대한 군비 증강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흘러나오는 중국의 대만 침공 훈련 등만 보아도 정말 평화적 부상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요. 특히, 시진핑 정부가 집권한 이후에는 과거보다 해양에 대한 팽창적 기세가 더 나타납니다.

 중국의 2015년 국방 백서를 살펴보면 핵심 키워드로 해금과 팽창이 등장할 만큼 해상 이익에 대해 민감하며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와 같은 해상 권리와 이익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자연히 중국의 해양을 수호하는 PLA 해군에 대한 강조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동중국해에도 중국과 일본이 팽팽한 긴장 상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센카쿠 열도란?

 센카쿠 열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8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거리상으로는 일본의 섬으로부터 150km 대만으로부터 약 140km 떨어져 있고 중국 입장에선 원저우를 기점으로 356km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거리만 보면 중국이 여기에? 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요 중국은 센카쿠 열도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중국의 주장에 따르면 명나라나 청나라 시기에 만든 지도에 센카쿠 열도가 포함되어 있었고 유럽 사람들이 만든 중국 지도에 댜오위다오가 중국 땅으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중국에 따르면 일본이 1895년 청일 전쟁 때 불법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청나라 시기 일본이 청일 전쟁의 승리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타이완과 댜오위다오까지 불법적으로 가져갔다고 주장합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사실 중국의 이러한 입장으로 타이완도 센카쿠 열도에 숟가락을 얹고 있습니다. 대만 측은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과 함께 댜오위다오를 가져갔고 사실상 위치도 대만에 가장 가까우니 대만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양국의 입장

 한편, 일본 측의 주장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1879년 일본이 오키나와현을 병합하고 1894년에 센카쿠 열도를 발견하고 1895년에 편입시켰고 이를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 점령시기 때 미 군정으로 편입되고 1970년대에 반환합니다. 즉, 일본 측은 센카쿠 열도를 청나라로부터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일본 측이 발견했다는 것이죠. 미국은 일본의 특정 가문에 센카쿠 열도를 넘겼고 이를 근거로 일본은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겁니다.

센카쿠 영토 분쟁의 이유

  센카쿠 열도는 양국에게 여러가지 이유로서 그 가치를 지닙니다. 첫 번째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센카쿠 열도를 차지하면 다양한 해양자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1968년 UN의 아시아 근해지역 광물자원 공동탐사조정위원회(CCOP)의 조사 결과 센카쿠 열도 해저에 2천만 배럴의 석유와 175억 입방피트의 천연가스의 매장 가능성이 발표되면서 두 국가가 센카쿠 열도를 본격적으로 인지하고 자국의 교과서와 지도에 표기한 것을 보면 그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남중국해처럼 동반되는 수산자원도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로 두 국가의 국내 정치적으로 민족주의가 분쟁을 격화시켰다고 생각하는데요.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임으로서 기존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증명하진 못했지만 새롭게 부강한 중국을 내세우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경제 성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개혁 개방을 통해 고도 성장을 이뤄냈지만 한편으로 사회 통합과 통제를 위한 사회주의를 잃으며 국민을 결속시킬 대체 이념을 찾고 있었고 사회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국민을 하나로 묶는데 적합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과거 일본으로부터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는 만큼 반일주의는 더욱 크게 나타날 수 밖에 없죠.

일본 보수 우익의 대표 고이즈미와 아베

 여기에 일본도 1990년대 버블 경제로 인한 장기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2010년에는 중국에 GDP 추월을 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연히 고이즈미나 아베와 같은 강한 일본을 만들고자 하는 보수우익이 지지를 받으며 물러서지 않는 강경한 외교정책을 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센카쿠 열도 분쟁이 격화된 2012년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리더십이 개편되는 시기에서 발생한 내부 갈등과 불만을 은폐하기 위해 중국이 센카쿠 분쟁을 이용했고 일본도 민주당이었던 노다 정부가 보수 세력의 표를 모으기 위해 강경 조치를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센카쿠 열도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데요. 센카쿠 열도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가치가 높습니다. 중국으로선 태평양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서 센카쿠 열도를 활용할 수 있고 센카쿠 열도를 차지하면 미국에 대항하여 반접근 지역거부에 이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열도는 페르시아-인도양-말라카해협-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지이기 떄문에 양국은 여러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전략적 이익에 따라 센카쿠 열도에 관심을 보입니다.

갈등의 점화

 현재의 센카쿠 열도는 미 군정 이후 일본의 가문에게 넘겨졌고 2012년 노다 정부 시기 국유화되면서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로 편입됩니다.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국유화 선언으로 중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 제한 조치를 단행했고 강력한 외교적 질타와 함께 센카쿠 인근 해역에 중국 정부 소속 선박을 파견하는 등의 대응을 이어갑니다. 이와 별개로 중국 내에서는 대규모 반일본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시위로 인해 중국 내 일본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120여개의 중국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나며 여러 일본의 재산이 불타고 약탈당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정말 최악으로 치닫고 중일 관계의 최고 위기 상황에 몰립니다.

중일수교 당시 왼쪽의 저우언라이 오른쪽의 다나카

 하지만 이 센카쿠 열도가 처음부터 분쟁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중국과 일본은 냉전 시기 경제적 실리에 기반해 굉장히 좋은 관계였습니다. 1972년 역사적인 미중 레프로시망으로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자마자 가장 먼저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이룬 것도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미중 화해와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만큼 소련 견제에 대한 유인이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에 대한 투자와 경제 성장으로 인해 생긴 잉여 생산물을 중국에 수출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에 가장 먼저 중국과 수교를 맺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천안문 사태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는데요. 미국의 강요로 서방 진영에서 중국을 압박하긴 했지만 가장 빨리 중국과 경제 교류를 맺습니다. 결과적으로 냉전이 붕괴하는 시점에는 일본 수상들(호소카와, 무라야마)의 Sorry Moment(과거에 대한 반성)와 함께 일본 천황이 중국에 방문하면서 두 국가는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중국을 방문한 왼쪽의 아키히토 천황

 따라서 이 시기에는 두 국가가 경제적 실리에 기반해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센카쿠 열도에 다량의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1960년대 후반에 밝혀졌는데도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두 국가는 서서히 충돌합니다. 중국은 일본의 해상 자위대가 센카쿠 열도를 정찰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1990년대에는 댜오위다오를 중국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해버리고 해양 탐사선, 오일 시추선 그리고 어업 선박 등을 파견합니다.

저번 남중국해 포스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의 해양 팽창은 조금 특이한데요. 이때도 중국은 원하는 섬을 차지하기 위해 해양 탐사선 오일 시추선 등 준 군사 능력을 이용합니다

2010년 충돌

 센카쿠 열도가 본격적으로 분쟁 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는 2010년입니다. 2010년은 중국이 일본의 GDP를 추월한 역사적인 시기이기도 하며 센카쿠 열도에서 양국의 큰 마찰이 일어나게 됩니다. . 따라서 남중국해 문제의 시작은 과거였지만 본격적으로 갈등이 점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10년입니다.

2010년 동중국해 위기는 중국의 어선이 센카쿠 열도에서 어선 활동을 하다가 일본 자위대의 센카쿠 열도 감시선과 충돌하여 체포된 사건을 말합니다. 일본 측은 중국 어선이 고의적으로 충돌해 센카쿠 열도의 평시 준비 태세를 점검한다고 생각해 선장을 체포하여 선박을 나포합니다. 중국은 이에 굉장히 강력하게 반응하여 당장 중국의 어선과 선장을 송환할 것을 요청하고 불응시 강제적 수단으로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강경 대응합니다. 또한 이에 대한 제재로 희토류 수출 제한 및 관광 금지 등의 조치를 병행합니다. 따라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중국에 선장과 어선을 돌려보냅니다.

2012년 센카쿠 열도 국유화

 2012년에는 결정적으로 이전 2010년에 센카쿠 열도 충돌로 위기를 느낀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아예 국유화해 버립니다. 따라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규모 반일본 시위가 중국 내에서 일어나게 되고 중국은 이 지역을 분쟁 지역화하기 시작합니다. 중국 외교부는 일본의 조치가 중국에 원자 폭탄을 투여한 것과 같다고 비판하며 중국 선박들을 센카쿠 열도에 파견합니다.

국유화 당시 대규모 반일 시위

 중국은 센카쿠 열도에 해양 감시선을 파견하고 어선들과 이를 호위하는 해군까지 파견합니다. 일본도 이에 질새라 군함을 출동하여 이 지역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는 센카쿠 열도 해역에 지속적으로 순시 활동을 하고 2013년에는 해양의 무력 충돌에 대한 대응을 위해 국가해양국을 신설하기도 합니다. 국가해양국은 중국의 해양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 조치를 하는 선봉 부대의 역할을 합니다. 거기다 같은 해에는 중국 함선이 일본의 항공기에 레이더를 조준하기도 했고 연말에는 동중국해를 방공식별구역으로 선포하기도 하면서 영유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진행합니다.

 이러한 중국의 해경 순시선의 순찰 활동은 2017년까지 29차례 지속되었으며 2013년에는 센카쿠 열도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을 중국 해경 순시선이 내쫒았던 일도 발생하면서 잦은 충돌이 일어납니다. 2018년에는 중국이 잠수함도 파견하고 이후에는 해상을 넘어 전투기 파견 및 훈련까지 이어가면서 일본도 2023년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섬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등 중국의 군사 활동을 견제합니다.

 이처럼 동중국해 분쟁은 아직까지도 여러 차례에 걸쳐 마찰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충돌의 양상이 점점 확대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게다가 일본의 아베 총리가 미국으로부터 센카쿠 열도가 미일 동맹의 명백한 방위 대상이라는 확답까지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나아가 대만까지 포함될 수 있는 분쟁 지역이라고 생각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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