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al Address
304 North Cardinal St.
Dorchester Center, MA 02124
Physical Address
304 North Cardinal St.
Dorchester Center, MA 02124
안녕하세요 호시탐탐입니다. 이번에 포스팅에서는 이집트의 나세리즘 그리고 수에즈 위기에 대해서 다뤄볼까 합니다. 지금의 중동이 이스라엘과 하마스 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것처럼 과거부터 중동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포스팅해볼 내용은 2차 중동 전쟁이라고 불리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입니다.
2차 중동 전쟁은 상당 부분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등의 서구권과 아랍 민족주의인 나세리즘 간의 격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1950년대는 시대적으로도 냉전이 시작되고 미국의 핵우위를 바탕으로 한 봉쇄 정책이 진행되는 시기였고 중동은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셰일 혁명으로 미국, 중국, 캐나다와 같은 국가들이 원유를 생산할 수 있지만 당시 유럽은 유럽의 석유 생산량의 9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 영국 등의 국제석유기업들이 중동의 석유를 독점하면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산품을 만드는데 기본적으로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석유라는 에너지원은 굉장히 중요하고 민감한 자원으로 인식됩니다. 유가 상승이 물가 상승을 일으키는 것처럼 석유라는 에너지원은 강대국 입장에서 적국에 넘어가도록 좌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미국과 서구의 입장에서 중동은 자국의 경제적 이권이 놓인 지역이자 소련 봉쇄 구상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영웅으로 거듭난 아이젠하워는 1950년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전임 트루먼 행정부에서 시작한 공산권 봉쇄 정책을 이어받아 뉴룩(New Look) 정책을 펴게 됩니다. 아이젠하워는 정책을 구성하는데 있어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해야한다는 생각과 공산주의를 저지하는데 있어서 지나친 예산을 투입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를 봉쇄하는데 있어 지나친 예산을 투입해 생기는 국방비의 과다지출이 미국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불러오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파산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유지비가 많이 들고 국방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는 재래식 군대 대신에 당시 미국이 소련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공군력이나 핵탄두를 강화합니다. 여기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핵정책인 “대량보복전략”이 탄생하며 핵우위를 활용한 적극적 억지를 추구합니다. 실제로 1953년 핵탄두는 1000개였지만, 1961년에는 18,000개로 늘리게 됩니다.
또한, 효율적인 소련 억지를 위해 아이젠하워는 핵무기 이외에도 동맹체제나 비밀 공작과 같은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지역에 NATO와 같은 집단방위체제를 연결해 소련에 대항하고자 오세아니아 지역에 ANZUS, 동남아 지역의 SEATO, 그리고 중동 지역의 MEDO를 계획합니다. 미국은 각 지역에 유럽의 NATO와 같은 조직을 만들고자 하였고, MEDO는 그런 차원에서 중동판 NATO 구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NATO의 터키와 SEATO의 파키스탄과 함께 MEDO(Middle East Defense Organization)를 창설해 대소 봉쇄선을 구축하여 아랍 국가를 포괄하는 중동의 집단 방위체제를 구상합니다.
MEDO는 1951년 미국, 영국, 프랑스, 터키 4국 간 구상한 중동사령부를 기반으로 하여 1955년 이란, 터키, 파키스탄, 영국, 이라크로 구성된 바그다드 조약기구로 구체화됩니다. 당시 미국이 구상한 중동집단방위체제에 있어서 당시의 아랍국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랍 민족주의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이집트는 미국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친공산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바그다드 조약기구는 힘을 잃게 됩니다.
이후 기존 회원국이었던 이라크도 쿠데타로 인해 정권이 바뀌며 기구를 탈퇴하게 되었고 바그다드 조약기구는 실패하며 CENTO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뒤 형식적으로 존재를 이어갑니다.
나세르는 이집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52년 군부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1954년 이집트의 총리로 취임하게 됩니다. 집권 후 나세르가 처음으로 진행한 일은 아랍권의 주도권 장악과 국민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아스완 댐 건설사업이었습니다.
아스완 댐 건설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해외의 원조가 필요한 실정이었고 당시 중동은 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설립전쟁)의 패배 이후 반제국주의 인식으로 인해 이집트가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될 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책을 완화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중동 아랍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이집트는 소련의 원조를 받게 됩니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는 나세르 정부가 개발 사업을 위해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954년 영국과의 수에즈 운하 협정으로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 댐 사업 등을 감당하기 위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미국은 이집트를 MEDO에 가입시켜 반공 체제를 완성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나세르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 보다는 자주적인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을 채택합니다. 미국이 중심이 되어 소련을 견제하는 집단 방위체제 보다 아랍 국가들로 구성되어 이스라엘의 위협을 관리하는 자생적 방위체제를 더 선호하였고, 외교적으로도 1955년 반둥회의에 참석하며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을 확고히 합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나세리즘은 범아랍주의, 비동맹 중립주의적인 사상으로 당시 중동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의 이념에서 탄생합니다.
나세르의 이념은 아랍 민족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인 색채도 띄고 있습니다. 나세르는 국내적으로 주요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당, 정부, 의회에서 일당독재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급 투쟁을 부정하면서 일정 제약 하에 사유 재산을 보장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아랍이라는 민족의 통일과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기존의 공산주의와는 차이점을 보입니다.
1955년 미국과 영국은 중동에서 아랍-이스라엘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알파 플랜(Alpha Plan)’이라는 비밀작전을 수립합니다. 알파 플랜은 이스라엘의 일부 영토를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 할양하는 대신 아랍은 이스라엘의 국경을 보장하고, 대이스라엘 제재를 종결시키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미국은 이집트 나세르 정권에 아스완 댐 건설을 지원하는 유인책을 던지면서 이집트-이스라엘 양국 간 평화협상을 시도합니다. 알파 플랜은 이집트에게 당근을 주는 유화정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평화협상에서 양국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끝이납니다.
알파 플랜이 실패함에 따라 미국은 1956년 기존의 유화책을 버리고 강경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새로운 강경책의 이름은 ‘오메가플랜(Omega Plan)’으로 채찍을 이용해 나세르 정권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제합니다. 오메가 플랜으로 미국은 중동에서 이집트에 대항하는 패권국을 육성합니다. 이때 미국은 새로운 패권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육성하기 시작하고, 기존에 약속했던 아스완 댐에 대한 원조를 철회합니다. 또한, 미국은 이집트의 우방이었던 시리아를 약화시키고 바그다드 조약기구의 힘을 키우고자 합니다.
미국의 오메가 플랜은 강경책을 활용해 이집트의 정책 변화를 유도한 정책이었지만, 오히려 이집트를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미국이 1956년 7월 아스완 댐 원조 약속을 철회하자 이집트는 정책 변화는 커녕 시리아와 더욱 결속하고 공산권과 결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응수합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획이었던 아스완 댐 건설에 제동이 걸리자 1956년 7월 26일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가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만들어졌고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국제수로로 세계 최대의 해운 운하입니다. 수에즈 운하는 중요한 석유 수송로로서 당시 석유 생산의 상당 부분을 중동이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중요한 에너지 수송로였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을 잇는 위치로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입니다.
이런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가 국유화 해버리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며 군사력을 사용을 주장합니다. 반면, 미국은 다른 아랍 국가들을 의식해 무력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의 통행료를 징수하면서 오메가 플랜을 지속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노력에도 1956년 10월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3개 연합군은 이집트를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국은 무력 개입이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더욱 서방을 적대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소련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는 것을 우려해 지속적으로 개입 반대를 주장합니다.
미국은 영국의 파운드화의 약세를 이용해 IMF가 영국에 비상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막았고 소련 또한 영국과 프랑스에 최후통첩을 발표합니다. 결국 양 강대국의 압박에 영국과 프랑스는 전투는 승리하였지만 다시 철수하며 원상복구를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전투에서는 승리하지만 국제정치적으로는 패배합니다. 반면, 나세르의 이집트는 전쟁에서 패배하고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승인받아 국익을 확보하며 정치적으로 승리합니다.
비록 나세르가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이권을 보장받으면서 나세리즘은 급물살을 타며 아랍 전역에 영향력이 한층 강력해집니다. 수에즈 사건 이후 아랍 민족주의가 고취되면서 그 영향으로 친영국 성향이었던 이라크도 아랍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쿠데타가 일어나 까심 장군이 정권을 잡으며 공화국으로 변모합니다. 또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를 계기로 1958년 국가 통합을 이루었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도 함께 고취되면서 나세르의 주선으로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창설됩니다.
이처럼,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국가들은 수에즈 사건을 계기로 영향력이 커진 반면, 미국이 지원하는 사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왕정국가들인 이라크나 요르단 같은 국가들은 영향력이 감소하게 됩니다. 요르단과 이라크에서는 왕정체제를 전복하고자 쿠데타가 발생하기도 하며 바그다드 조약 기구는 실질적으로 힘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수에즈 운하 위기를 중심으로 기존에 미국의 구상과 정책은 실패하였고 나세리즘은 강력해지며 중동 지역의 정치환경이 변화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2차 중동 전쟁인 수에즈 운하 위기와 나세리즘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포스팅해봤는데요. 추가로 궁금하신 주제에 대해 댓글 남겨주시면 참고해 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광석, 2014,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중동 집단방위체제 구상의 좌절, 한국중동학회논총 34권 4호, p1-25
권오신, 2005, 아이젠하워 대외정책의 기조: “뉴룩(New Look)” 정책과 “아이젠하워 독트린, 미국사연구 21권, p1141-173
최동주, 2002, 중동분쟁과 나세리즘, 한국아프리카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