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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시탐탐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선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영토 분쟁인 카슈미르 분쟁과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에 대해서 적어볼 예정입니다. 앞서서 인도와 중국에 관한 포스팅에서도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요. 카슈미르 지역은 오른쪽으로는 중국과의 악사이친 지역이 그리고 왼쪽과 위로는 파키스탄과 붙어있는 지역인 만큼 3국 관계에서 굉장히 뜨거운 분쟁지역입니다.
특히, 본래 하나의 나라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현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핵을 겨눌만큼 사이가 안좋은 상태인데요. 불과 몇 주 전에도 반군의 기습으로 인도 경찰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던 만큼 오늘은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현재의 카슈미르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부터 시작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간의 관계에서도 등장한 영국이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도 또 등장합니다. 국제 정치를 공부할수록 패권국들의 만행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선 본래 인도 제국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은 17세기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양모, 아편, 설탕 등으로 인도 지역의 무굴 제국과 교역을 시작했고 점차 이 지역을 식민지화해 직접 지배했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미얀마 등의 영토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굉장히 큰 지역이었던 만큼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하나의 통합된 제국으로 유지되기 보다는 각각의 토후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위치상 중동과 아시아에 걸친 지역인 만큼 교역을 통해 혹은 술탄 왕국의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슬람교도 유입되었으며 해당 지역에 힌두교와 불교를 포함해 다양한 종교가 자리잡게 됩니다. 영국은 17세기 부근 무굴 제국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이었던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세력권을 넓히면서 여타 지역들을 장악합니다.
사실상 초기 이슬람교의 유입부터 시작해서 영국의 본격적인 식민 지배 이전까지 인도 아대륙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는 거의 대립하지 않은 상태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세포이 항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과거 술탄 통치기부터 지도자들이 간간히 인도대륙의 이슬람화를 추진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특별히 적극적인 시도도 없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이슬람과 힌두의 대립구도가 나타난 것은 영국의 분할지배전략 이후인데요. 당시 인도 제국의 종교분포는 소수 지배층의 이슬람교와 다수 민중의 힌두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영국의 식민 지배를 통해 근대식 교육을 받은 다수의 힌두교인들이 점차 민족 운동을 전개하자 힌두 민족주의 확산에 대한 견제책으로 무슬림들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무슬림들을 적극 후원하고 국내 정치에 활용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소수자였던 무슬림들은 영국식 근대화를 받아들이며 빠르게 성장해가는 힌두인들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존에 지배자의 입장에서 영국에게 밀려 피지배자로 전락했는데 피지배자 사이에서마저 소수에 해당했기에 그 위기감은 적지 않았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무슬림과 힌두인들은 탄탄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영국은 두 종교의 대립각을 적극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힌두교 중심으로 창설된 인도국민회의에서 입지가 좁았던 무슬림들은 자신들만의 전인도 무슬림 연맹을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두 종교는 갈라지게 됩니다.
특히 두 종교의 분열 배경에는 영국이 힌두인들이 숭배하는 암소로 인해 무슬림들과 발생한 갈등에서 법원 판결로 무슬림을 지지하는 한편 뱅갈 분할령을 발표해 인구가 많은 뱅갈 주를 동부와 서부로 분할하여 무슬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됩니다.
또 한 무슬림들만 따로 독립된 서거구를 만드는 분리 선거구제를 도입하면서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영국은 1909년 인도통치법에서 종교적 소수집단 보호라는 명분으로 인도에 대의제 도입에 있어서 무슬림의 분리선거권을 인정합니다. 소수자의 위치에 있던 무슬림연맹은 분리선거권의 확대를 주장하는 반면 힌두인 주도의 인도국민회의는 분리선거제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양자 갈등은 더욱 심화됩니다.
결국 다수결의 원칙에 근거한 대의제가 도입되면 소수인 무슬림의 입지가 약화되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분리정책에 찬성하게 됩니다. 이후로도 인도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1934년에 이르러서는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독립 국가에 대한 열망이 구체화됩니다.
여기에 더해 1937년 인도 전역에서 치뤄 진 지방선거에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지방선거 당시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 국민의회와 무슬림연맹은 연합전선을 폈고 당시 국민의회의 대표 네루와 무슬림 연맹을 이끄는 진나는 선거 후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동의합니다.
선거 결과 자와할랄 네루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가 완승을 거두게 되는데 이때 세속주의 성향인 네루 총리가 기존의 약속을 어기고 연립 정부를 거부하면서 무슬림 연맹을 해체하고 국민회의에 들어오면 주정부에 참여시켜주겠다는 조건을 걸게 되면서 양자의 갈등은 더욱 심화됩니다.
2차 대전시기에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참전 요구에 국민회의는 반발하며 주정부에서 총사퇴를 선언하는 한편 무슬림연맹은 무슬림 독립국가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영국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면서 기존 국민회의가 지배하던 주정부로부터 해방과 파키스탄 결의를 선언합니다.
이처럼, 인도 국민회의는 무슬림의 분리 독립 반대를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분리 독립이 지지를 얻게 되면서, 양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국가로 분단되어 독립되면 끝날 것 같던 분쟁은 영토 분할을 명확히 하지 않아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어버립니다.
2차 대전 이후 인도의 독립을 두고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고 급기야 유혈사태까지 벌어지면서 통제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자 영국은 급히 통치 종식과 독립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이때 1947년 6월부터 8월까지 불과 3개월만에 국경선 획정이나 영토 문제 등의 문제를 급하게 처리하고 영국이 철수하게 되면서 독립의 날은 다가오는데 3개의 토후국 주나가르, 하이드라바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과 인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됩니다.
보통 토후국(군주국)의 인구 구성에 따라 인도나 파키스탄에 편입되는 형식이었는데, 주나가르와 하이드라바드는 다수의 힌두 주민에 무슬림 지배자가 지배하는 형식이었고, 카슈미르는 다수의 무슬림을 힌두 지배자가 다스리는 지역이었습니다. 파키스탄에 직접적으로 인접해있지 않은 주나가르와 하이드라바드는 인도 정부가 발빠르게 병합하면서 인도에 편입되었지만 카슈미르 지역은 사진과 같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 닿아 있는 지역인 만큼 굉장히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양국은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고 인도가 카슈미르 지역을 병합한 후에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전쟁을 치르며 앙숙의 사이로 변모하게 되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핵을 겨냥하는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본래 하나의 국가였던 양국은 이제 적이 되어버렸는데요. 나머지 카슈미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