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치] 중국 정치 구조- 후진타오와 중국의 민주주의(Democracy of China)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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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오쩌둥부터 시작해 덩샤오핑 그리고 장쩌민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국 정치 시리즈의 다음 리더십 후진타오에 대해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이전 포스팅들을 보면 중국 정치가 어떠한 형식으로 변화를 맞이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마오쩌둥이 실시한 사회주의 방식의 발전(대약진 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자본주의의 요소를 받아드린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과 제도화를 통해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장쩌민 시기까지 알아보았습니다.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

이번에 다뤄볼 중국의 리더십은 장쩌민 이후에 중국에 집권한 리더인 후진타오입니다. 후진타오는 역대 중국의 리더들 중에 서방으로부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리더입니다. 후진타오 시기 중국과 서방은 전천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서방 또한 중국의 부상이 평화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비교적 중국의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보여준 후진타오의 리더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후진타오 시기 전반

장쩌민 주석 시기 중국의 폭발적 성장이 지속되면서 후진타오 주석 시기부터 중국은 강대국 반열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후진타오 시기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고 2010년에는 일본의 GDP를 추월하는 등 중국이 강대국이 되었음을 전세계에 보여줍니다.

 후진타오 주석 또한 10년간의 경제 성장을 주도하고 국방 현대화를 통해 강력한 군사력을 키웠고 많은 대외 활동을 통해 중국의 소프트 파워를 확대시킵니다. 후진타오 시기 중국의 주요 이슈는 2008년 경제위기와 베이징 올림픽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평화적부상태제 :

후진타오 주석은 중국의 부상은 평화로울 것이라는 “평화적 부상 태제”를 서방에 보여줍니다. 이전부터 서방 세계에서는 체제적으로 공산당 1당 독재의 중국이 부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했는데요. 체제적으로도 다르며 개혁 개방으로 인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중국에 대해 미국은 의심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눈부신 성장률을 기록하는 중국이 미국에 맞서 패권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죠. 이때 후진타오는 중국의 관심은 경제 성장에 있고 안정적인 내수 성장을 위한 평화로운 대외 환경을 원한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의 환경은 완전 뒤바뀌어 버립니다. 부쉬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중국 정부와 전략적 제휴 관계를 취하는데요. 이로 인해 중국과 미국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던 것도 있고 미국이 전략적으로 쌓이는 대중국 적자나 문제들을 묵인한 부분도 있습니다.

부쉬 대통령의 부쉬 독트린 발표

 전문가들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한 2000년대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시기였는데 부쉬 정부는 이를 놓쳤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장쩌민 시기보다 심화된 당내 민주주의적 환경을 보며 서방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일정부분 거두게 됩니다.

2008 금융위기 :

 본격적으로 중국이 부상하게 된 기점은 2008년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발발하면서 미국에서 일어난 타격이 세계화에 따라 세계 금융위기로 번지게 되는데요. 중국은 이 시기를 심각한 피해 없이 막아냅니다. 중국 또한 주요 수출국인 유럽과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큰 타격이 있게 되는데요 실제로 이 시기 중국의 수출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정도는 -40%가 됩니다. 중국 정부는 금융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합니다. 중국 정부는 그간의 성장 과실을 사용하는데요 대규모 자본을 위기 타파에 사용합니다.

2008 금융위기 모습 : 리먼 브라더스 파

중국 정부는 내수 촉진을 위해 공공 부문의 인프라 투자를 시행하고 민간과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을 실시합니다. 약 4조 위안의 자본 중 50%를 투여하여 철도, 도로, 공항 등의 인프라 건설과 도시 개조하고 재해 복구와 주택 및 판자촌 등을 개조합니다. 또한 조세 감면을 실시하는데요 수출 주도형인 중국 경제의 특성상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약화된 수출로 타격을 입은 기업들을 지원하고자 세율을 낮추고 환급세율은 높입니다. 이처럼, 정부 주도의 사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내수를 활성화하며 수출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으로 위기를 비교적 원활하게 극복합니다.

위기를 비교적 잘 극복한 중국과는 다르게 다른 서방 국가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방과 중국 간의 경제적 간극이 좁혀지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2010년에는 중국이 일본의 GDP를 추월하게 되면서 중국은 더욱 자심감을 가지게 되고 서방 세계에서도 중국이 본격적으로 강대국화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

 금융위기의 극복과 함께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의 부상에 상징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으로 중국의 소프트 파워를 확산하고자 했고 중국의 부상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중국은 올림픽을 통해 국내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대외적으로 부상국의 이미지를 가져가며 서방에 발전된 중국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세계에 중국이 강대국의 한 축임을 각인하게 됩니다.

후진타오 시기 정치

 후 주석의 집권 초기에는 이전에 장쩌민 주석이 중앙 군사위원회의 주석 자리를 바로 승계하지 않아 불안정하게 주석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장쩌민 주석은 중앙 군사위의 주석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막후 정치나 영향력 행사를 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업적 보장이나 안전 장치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 군사위원회 :

중국에서 중앙 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입니다. 모든 리더들이 당 총서기 국가 주석 그리고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하는 것은 공산당 1당 독재체제인 중국의 특성상 군사력이 국가 통제에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앙 군사위원회는 당 내의 군사 지도 기관으로 중국의 군대인 인민해방군(PLA)과 중앙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은 1대1 소통 채널이 존재합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PLA)

 다시 말해 중앙 군사위원회는 지도자와 군대 간의 소통 채널로서 군이 지도자에게 직접적인 의사전달을 할 수 있게 하며 지도자와 군을 긴밀히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후진타오 시기 파벌 정치 :

따라서 후 주석은 장 주석으로부터 온전한 권력을 승계받지 못하며 불안한 상태로 출발합니다.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 최소 5인이 상하이방 인물들이었고 국정 운영을 하는 총리, 부총히 등의 간부들에서도 10명 중 최소 5명이 상하이방이었습니다. 군 지도부는 장쩌민이 중앙 군사위 주석이었던 것을 보면 장쩌민계 인사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이로 인해 후 주석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파벌에 집중하게 되는데요. 저번 포스팅에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의 대표 파벌들은 장쩌민계의 상하이방, 후진타오계의 공청단파 그리고 현재 시진핑의 권력기반인 태자당(당시는 쩡칭훙)으로 나뉩니다.

왼쪽부터 후진타오, 시진핑, 장쩌

 후진타오 집권기는 공청단파와 상하이방 그리고 태자당파 간의 세력균형이 잘 실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자연히 총서기의 권한이 역대 지도자들 중에 가장 약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파벌 간의 균형이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확대되는 형태를 보입니다.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줄여서 공청

후 주석은 초기에 불완전한 권력을 가지고 공청단파를 늘리는 한편 쩡칭홍과의 협력을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2004년 장쩌민이 중앙 군사위 주석직에서 사임하면서 점점 상황은 개선되었고 2007년 즈음엔 온전한 총서기의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후 주석 시기의 1기와 2기에는 장 주석 시기 형성된 집단지도체제가 공고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기에 잔존하던 장쩌민계 파벌은 후진타오 2기에 들어 퇴진하게 되고 시진핑이 국가 부주석으로 떠로으며 시진핑계의 태자당과 후진타오계의 공청단파가 균형을 이루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물론 최근에 시진핑 집권 형태를 보면 권력은 사유화되고 1인으로 집중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공청단파가 퇴진하는 모습이 됩니다.

당내 민주주의 진전

 앞서 말한바와 같이 후 주석 시기 중국 정치의 특징은 바로 당내 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장쩌민 주석 시기부터 서서히 당내 민주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하고 후진타오 시기에는 더 심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후 주석은 당내 민주주의를 주요 정치개혁의 하나로 추진했습니다. 2002년 공산당 16차 당대회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통한 인민 민주주의 견인 방침’을 확정하며 공산당 내에 민주주의 발전의 방향을 제시했고 2007년에는 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지도부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등 민주적인 원칙을 강조합니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정말 생소하시겠지만 후 주석은 2017년에 17차 당대회에서 민주주의란 말을 60차례 이상 언급합니다. 후 주석은 위의 방침들로 당원에게 당의 업무를 공개하고 당원들의 당 업무 참여 및 민주적 토론 환경을 적극 조성합니다.

 후진타오 시기 민주주의가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후 주석이 강조한 투명성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서 투명성이란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요 투명성의 증대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투명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활동이 공개된다는 것인데 그 동안 비공개였던 것이 공개되면 그만큼 비판적인 시선과 개입이 증가하기 때문에 공직자가 함부로 행동하기 힘든 환경이 조성됩니다.

 여기에 더해 후 주석은 총서기의 권한을 축소합니다. 후 주석은 당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총서기의 권한을 일부 축소하고 총리, 전인대 위원장, 전국 정협 주석 등 국가 대표기관 및 대표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연히 이들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하며 의사결정에 더욱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역기능

 하지만 후진타오의 이러한 정책이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는데요. 보시라이 사건과 같이 부패한 정치인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아내의 살인 사건을 덮었던 일도 발생하면서 미흡한 정치적 개혁이 지적받기도 합니다.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점점 분권화한 것에 대한 역기능으로 정치인들의 부패가 많아졌고 통일성 있는 의사결정이 저해된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공산당 1당 독재의 방침은 유지하고자 했기에 검열과 사회 통제는 강화된 측면도 있었습니다.

재판을 받는 보시라이

 또 한편으로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대만 내 친 독립 세력을 저격해 반국가분열법을 제정하여 대만과의 통일에서 평화적 수단이 통하지 않을 시 무력을 활용하겠다는 것을 법으로 명시하기도 합니다. 후 주석은 조화로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소수민족의 분리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민주주의의 진전을 추구했지만 공산당 1당 독재와 같은 큰 틀은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까지 후 주석 통치 기 중국 정치 전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중국 정치 시리즈도 시진핑 주석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시 주석은 현재 3연임으로 종신 집권의 문을 열면서 다시 중국의 권력을 리더에게 집중시킨 장본인입니다. 다음 포스팅에선 과거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형 리더인 시진핑과 시진핑 집권기의 정치에 대해서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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