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치] 중국 정치 구조- 장쩌민과 집단지도체제(Collective Leadershi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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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시탐탐입니다 이번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중국을 이끌었던 리더십 장쩌민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덩샤오핑이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면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주석은 찬란한 발전을 견인한 리더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대내외적으로 상당히 안정적인 정치를 실현했는데요. 이 두 주석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서방과의 사이도 특히 좋았고 90년대에 3차 대만해협위기가 있기도 했지만 장쩌민의 외교력으로 협상을 통해 문제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당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이 시기 중국에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후에 집권한 시진핑이 다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일말의 가능성이 보이던 민주주의도 쇠퇴하기는 했지만 말이죠. 따라서 이번 포스팅에선 장쩌민 주석을 중심으로 한 중국 정치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찬란한 90년대

 1990년대 중국을 이끌었던 장쩌민은 중국에서 ‘찬란한 90년대’라는 중국 경제 성장의 황금기를 이끈 리더입니다. 이 시기 중국은 연평균 9%대의 경제 성장을 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성장궤도에 오릅니다. 거기다 직전의 천안문 사태를 빠르게 덮기 위해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작업에 착수하며 그 여파를 빠르게 진압하려고 노력합니다. 장쩌민의 심복이었던 쩡칭훙은 천안문 사태 당시 당과 정부에 비판적이면서 학생 시위에 동조한 현지 매체 <스졔징지다오바오(世界經濟導報)>를 신속하게 정리하고 천안문 사태의 확산을 우려해 상하이에서 유혈 충돌이 없도록 사전에 조치합니다.

또한 장쩌민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 중국의 경제는 더욱 탄력을 받게 되면서 중국은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거기다 2001년에 중국은 WTO에 가입하면서 화룡점정을 이룹니다. 기존에 중국의 경제 구조는 수출주도형 성장이었는데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해외 투자를 유치하면서 중국이 수출 산업 기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거기에 과거 장쩌민 시기 1994년 의도적으로 위안화의 평가 절화를 감행하면서 중국산 물품에 대한 국제적인 경쟁력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낮은 환율로 인한 낮은 토지 가격과 인건비로 해외 투자도 더욱 잘 들어오게 되는 효과를 봅니다.

장쩌민의 정치로 중국 성장
중국의 연간 GDP 성장률 (90년은 천안문 사태로 저점)

중국의 WTO 가입 :

거기에 중국이 2001년 WTO에 가입하게 되면서 2001년 중국의 GDP는 1조 3천억 달러에서 2007년 4조 달러로 성장하는 빠른 성장 곡선을 보입니다. WTO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표적인 무역기구로서 자유 무역에 있어 핵심적인 기구입니다. WTO는 기존에 GATT에서 발전된 형태의 기구로서 호혜와 차별금지의 두 가지 실행원칙을 골자로 합니다. 따라서 WTO의 회원국들은 자유 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관세와 보조금 철폐를 주장합니다.

 이에 따라 회원국들은 해외의 수입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국내 제품과 동등하게 대우하여 세금이나 규제를 해야 한다는 내국민 대우와 어떤 국가에도 차별적인 특혜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최혜국 대우를 통해 국가들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무역을 촉진시키고자 합니다. 따라서, 중국이 여기에 가입함으로 인해 중국의 성장을 더욱 가속화합니다.

중국의 개혁 정책들 :

 또한 장쩌민은 개혁 개방을 심화시키기 위해 정치적 개혁과 경제 부문에서 4대 제도 개혁을 감행합니다. 경제 부분의 4대 제도 개혁은 장쩌민 시기 총리를 역임한 장쩌민의 파트너 주룽지에 의해 진행되었는데요. 주룽지는 강력한 반부패 운동과 세제, 은행, 환율 그리고 공공기업 네 가지 분야의 개혁을 통해 개혁 개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경기 과열을 잠재우며 경제 성장을 견인합니다. 주룽지 총리는 세금 종류를 단순화하고 부가가치세를 증세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며 은행의 독립성을 높이고 평가절하 정책을 통해 중국 상품의 해외 경쟁력을 높입니다. 거기에 중요치 않은 기업을 민영화하고 국유기업에 대한 주식제 도입 확대와 주식합작제를 시행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합니다.

정치적으로 이 개혁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역할 회복을 뜻하고 공산당의 조직과 운영의 제도화를 뜻합니다. 여기서 제도화는 법과 규칙에 의해 특정 질서를 구축한다는 뜻으로 본격적으로 당 대회,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의 당 조직들을 “당헌과 당규”에 따하 조직하고 운영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전 시기 덩샤오핑의 원로 정치로 인한 수직적 명령 하달로 사실상 권력 기구로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한 기구들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장쩌민 시기 정치

 이로서 장쩌민에 의해 공식적인 기구들이 회복되면서 중국 정치의 핵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역할이 강화됩니다. 이전에 중국 정치에 대한 첫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이 중국 정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이며 최고 의사결정기관입니다. 현재의 상무위원회를 보더라도 국가 주석인 시진핑 주석과 리창 중국 총리, 전인대(입법부) 상무위원장, 그리고 시진핑의 중국몽을 설계한 왕후닝 등 핵심적인 인물이 분포되어 있는 조직입니다.

장쩌민 전 중국 주석

 앞서 말한바와 같이 장쩌민은 중국 헌법과 당헌에 따른 통치를 강조하며 의법치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헌법과 당헌상 중국 권력의 최고 핵심조직인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떠오르게 됩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기에는 상무위가 카리스마 리더십이 지시에 따르는 하부 기구였다면 장쩌민부터는 제대로된 의사 결정 기구로서 상무위원회가 회복되면서 총 서기의 독단적 의사결정 보다는 상무위원회에서의 협의를 통한 의사 결정이 강화됩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상무위원회의 힘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총서기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총서기의 권력이 상대적 약화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First Among Equals). 이로서 총서기와 상무위원회가 견제와 균형을 맞추게 되면서 의사결정이 이루지면서 당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피어나게 됩니다.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의 등장

상무위원회의 기능 회복과 더불어 덩샤오핑 시대와 달리 중국 관료들의 성격도 많이 바뀌게 되는데요 이전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덩샤오핑의 퇴진과 함께 장쩌민 체제에서는 새로운 정치 권력이 등장합니다. 덩샤오핑과 함께 막후 정치를 주도했던 핵심 원로들은 이제 노화해 퇴진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원로 정치(Gerontocracy)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요 원로들이 쇠퇴함에 따라 자연히 새로운 정치 세력이 자리잡게 됩니다.

4대 제도 개혁을 실시한 주룽지

새로운 정치 세력은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로 불리며 실무형 기술 관료들을 뜻합니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존에 정치를 장악했던 혁명 세대들과 다르게 혁명 이후 중국이 수립된 이후 제대로된 제도권 교육을 받은 1세대입니다. 따라서 과거 혁명 원로들과는 다르게 정치인들이 이념성이 적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쩌민 또한 테크노크라트에 해당되고 테크노크라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원로들과 다르게 과학적 혹은 전문적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어 중국 공산당의 효율적 운영에 더욱 능숙했습니다. 이에 따라 본격적으로 중국은 개혁 개방을 심화시키고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따라서 테크노크라트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에 이념적인 투쟁 보다는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정치는 안정화되기 시작합니다. 장쩌민의 지도 아래 경제 성장, 외교 및 국방 현대화와 WTO 가입 그리고 미중 간의 화해 지속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냅니다.

파벌 정치(Factional Politics)

장쩌민의 지도 아래 집단지도체제에서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개인 혹은 개인의 파벌이 아닌 여러 지도자들과 이들의 파벌이 정치권력을 나눠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전에도 집단 지도 체제의 형식은 존재했지만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졌다면 장쩌민 시기 중국의 엘리트 정치는 조금 더 협의형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여러 정치 지도자들이 조금 더 평등한 상태에서 의견 교환이 가능해지면서 자연스레 지도자들 간의 파벌 정치 형태가 됩니다.

장쩌민 체제의 대표적인 파벌로는 장쩌민 집권 1기와 2기를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요. 덩샤오핑 시기부터 마오쩌둥처럼 종신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의 지도자들은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중임을 하고 임기를 마치기 때문에 집권기가 1기와 2기로 나뉘었습니다. 장쩌민 체제의 집권 1기에는 장쩌민-차오스-리펑의 세 지도자에 따라 파벌이 나뉘는 삼두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쩌민계의 상하이방 파벌:

우선 장쩌민의 세력은 상하이방으로 상하이방은 장쩌민의 고향인 장 쑤성과 그가 주로 활동한 상하이 출신들로 이루어진 계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장쩌민이 주석으로 임명되면서 함께 당과 정부의 요직으로 진출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권 1기 서열 2위의 리펑 총리 중심의 보수파와 서열 3위이자 전인대 상무위원장인 차오스가 이끄는 개혁파 그리고 서열 1위이자 주석인 장쩌민이 이끄는 상하이방 이렇게 세 파벌로 나뉜 형태였습니다.

장쩌민은 과거 혁명의 후광도 없었고 덩샤오핑 개인의 신임을 받아 주석에 등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초기에 정치 기반은 약했습니다. 이에 따라 자신이 주로 활동했던 상하이 지역에서 자신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거기에 상하이방은 반부패운동을 빌미로 전통적 정치 세력인 베이징방의 인사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리펑계의 태자당 파벌 :

한편 리펑은 보수파의 대표로서 강한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보수파로서 1988년에 총리를 맡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장한 인물로 보수 원로 그룹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당연히 정치 세력도 혁명 1세대 원로의 자녀들로 구성된 ‘태자당’을 기반으로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리펑은 후에 장쩌민 집권 2기에도 장쩌민과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입니다

(출처: 세계일보https://m.segye.com/view/20120315022561)

차오스계의 공청단 파벌 :

마지막으로 차오스는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 진압 문제에서 무력 진압책을 반대하고 입법과 대의정치확립을 강조하는 등의 정치 개혁과 지방 분권 등과 같이 보수파보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며 개혁파 혹은 중도파로서 활동합니다. 차오스는 공안부문과 당 조직 등에서 활동하면서 당과 정부 그리고 군대에 폭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고 개혁파에 당시 서열 4위의 리루이환과 후진타오 그리고 티엔지원 등의 인사들이 포진하며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공청단파 : 왼쪽의 원자바오와 오른쪽의 후진타오

그의 지지 세력은 공청단파로 중국 공산당 청년 조직이라는 공산당 내 공동체입니다. 공청단은 중국 공산당의 인재풀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중국 공산당이 직접 운영하는 14-28세의 젊은이로 구성된 조직으로 공산주의 사회제도 구현을 목적으로 형성된 조직입니다. 이 조직에는 후에 주석이 되는 후진타오와 과거 총서기였던 후야오방 등이 속해있었습니다.

반면 집권 2기가 되면서 차오스는 실각하게 되고 차오스가 담당하던 중앙조직부장과 중앙판공청 등의 당기밀을 관리하는 정보계통에서 장쩌민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리펑과 장쩌민의 이원 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중국 정치는 기존에 카리스마 리더십에서 벗어나 출신 지역과 대학 혹은 경험을 통한 관시 즉 관계에 따라 형성되는 파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중국의 시민사회

본디 시민 사회라 함은 국가 권력과 시장으로부터 독립된 시민들만의 공간을 뜻합니다. 시민 사회는 말 그대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조직들의 집합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 이익 집단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죠. 거기에 더해 NGO, 재단, 신념에 기반한 단체 혹은 Trade Union 등이 시민 사회의 단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 사회에서 시민 사회라고 하면 언론과 집회 그리고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공간이고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학습할 수 있는 자치 공간의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이처럼 시민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천안문 시위 가 국가의 무력에 의해 무너지면서 중국에선 중국만의 시민 사회가 등장하게 됩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 국내적 혼란을 빠르게 정리하기 위해 장쩌민은 중국 만의 통제된 시민 사회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사회 행위자들에게 비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중국 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만 자유가 부여된 모순된 구조로 뒤 바뀐 형태로 말이죠. 이로서 중국에서도 다양한 직업군별 이익 단체들이 등장하고 비정무 단체들이 생성되지만 이들 단체는 모두 국가 권력인 공산당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노력합니다.

천안문 학살을 경험한 중국의 시민들은 더 이상 공산당에 대한 도전을 하지 않게 되고 공산당의 본격적인 검열 및 통제로 인해 공산당에 반기를 들기 쉽지 않은 여건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중국엔 중국 공산당의 정당성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서방과는 다르게 길들여진 시민사회(Tamed Civil Society)가 형성되게 됩니다.

중국의 고속 성장을 견인한 장쩌민 전 주석은 이전의 주석들보다 민주적이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비록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1990년대 중국은 비교적 조용하고 평화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안문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시민 사회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선 본격적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이끈 후진타오 주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시탐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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