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치] 중국 정치 구조- 덩샤오핑과 원로 정치(Gerontocracy)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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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시탐탐입니다 😉 오늘은 저번에 이어서 리더십 별 중국 정치에서 덩샤오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저번 포스팅에선 중국의 초대 국가 주석이자 현재까지 중국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마오쩌둥과 중국의 민주적 중앙집중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중국 정치 덩샤오핑의 연설
중국의 개혁 군주 덩샤오핑

 이번 포스팅에선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았던 중국 개혁 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과 덩샤오핑 시기 실질적으로 국정운영을 했던 원로들의 원로 정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다음으로 중국 정치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 개방 정책으로 급성장한 중국이 현재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현재처럼 중국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덩샤오핑 집권

 문화대혁명의 열기가 서서히 진압될 무렵 노쇠한 마오쩌둥은 더 이상 정치 일선에서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상태가 안좋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대외적으로 소련과의 영토 분쟁 및 스탈린 격화 운동(중국에도 확산될 것을 우려)으로 관계가 악화되었고 국경 부근에서 소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소련의 유화책으로 베트남과 북한이 친소련적 행보를 보이며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됩니다.

 이때 중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또한 중국과 관계를 개선할 유인이 존재했는데요. 미국은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대내적으로 강한 반발이 있었고 정권이 전복되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거기에 소련과의 군비 경쟁이 맞물리면서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과 화해하면서 공산권을 분열시켜 소련을 견제하고자 합니다.

미중 레프로시망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1972년 역사적인 미중 레프로시망(Sino-US Rapprochement)이 성사됩니다. 하지만 정작 미국과 중국의 수교는 1979년에 일어나는데요 이 간극 기간 동안에는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일어납니다.

마오쩌둥과 닉슨의 만남

 이 기간 통상적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된 화궈펑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당시 당 내부 파벌에는 저번 포스팅에서 나왔던 마오쩌둥의 최측근인 4인방과 문혁 이후 복권한 당의 관료들(덩샤오핑) 그리고 화궈펑을 위시한 마오쩌둥의 후계 집단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화궈펑은 복권당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4인방을 축출합니다.

 이때에도 중국의 목표는 문혁의 수습과 경제 발전이었는데요 화궈펑은 결정적으로 마오의 계승자로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 대혁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자신이 부정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인 것이죠. 이로 인해 화궈펑은 실각하고 덩샤오핑으로 권력이 이동하게 됩니다.

 덩샤오핑은 대표적으로 중국의 실용주의의 상징으로서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흑묘백묘론은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잡으면 된다”라는 뜻으로 경제 성장을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인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본격적으로 문화 대혁명에 대한 평가와 수습을 하기 시작합니다. 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탄압된 인사들을 복귀 시키고 점진적인 탈마오쩌둥화를 진행합니다. 이는 공산당의 분열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사후에도 절대적인 마오의 위상을 고려하여 마오에 대한 비판이 중국 공산당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여기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이룬 혁명의 과업과 노력 등의 공은 주요한 것이고 문화 대혁명 등의 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분류하여 당 내의 마오 지지자들(보수파)을 껴안습니다. 거기에 문화 대혁명의 책임이 4인방과 마오 같은 몇몇 개인의 잘못이며 당의 기본적인 권위와 시스템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체제 유지를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이로써 국내적으로 혼란을 진압하고 대외적으로 미국과 화해하면서 고립을 해소한 덩샤오핑의 중국은 본격적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시행합니다. 개혁 개방에서 개방은 다른 여타 국가들이 경제 발전을 위해 시행하는 것처럼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에 맞춰 미국 화해하며 수교하는 것을 기점으로 다른 서방 국가들과도 수교를 맺습니다. 특히 일본과는 미중 레프로시망 이후 바로 수교를 맺으며 경제 교류를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자본과 기술력에서 뒤쳐진 중국은 서방 선진국들에게 자본과 기술력을 제공 받고 서방은 거대한 중국 시장에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얻으며 쌍방이 이득을 보는 구조로 운영됩니다. 이에 따라 외국으로부터 차관과 투자를 받고 중국이 지정한 해안과 남부의 경제 특구를 중심으로 무역이 증대됩니다. 이로 인해 현재 중국은 거대 시장이 되었고 값싼 노동력에 따라 공장들이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중국에 투자금이 들어오며 기업들의 기술력이 이전되는 것입니다.

1984년 중국 최고층 건물이었던 선전시 궈마오(國貿)센터 완공식 현장

 하지만 개방과 함께 개혁이 단행되지 않으면 서구의 의심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덩샤오핑은 정치 개혁을 병행합니다. 개혁의 핵심은 헌법개정과 제도화였는데요. 요점은 더 이상 당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시스템 확립에 나선 것인데요. 이전 포스팅처럼 당이 다른 기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한 조치를 감행합니다.

 덩샤오핑은 헌법 개정으로 권력을 당에서 삼권으로 어느 정도 이양하고 중앙군사위원회를 창설하여 인민해방군과의 협의 채널을 만듭니다. 거기에 당과 정부를 분리하고 기업의 생산과정에 개입하지 않는 등의 조치를 취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격적인 제도화가 진행되는데 제도화의 핵심에는 당 권력 축소, 행정부의 권한 및 조직 강화, 전국인민대표대회의(입법부) 권한 강화 등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행정부의 인사들을 임명하고 입법부의 후보를 선출하는 구조로 운영되며 전에는 당의 인사가 행정부를 겸직하는 구조였다면 이후에는 당과 행정부를 인적 그리고 직능적으로 분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입법부의 입법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비판을 허용하게 되고 기업의 경영 관리나 영리 활동 등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산당이 유일 당으로 존재하는 형태이며 입법부와 행정부를 어느 정도 분리시키긴 하지만 당의 우위성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의 사회주의에서 당시 이념적으로 반대였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당시 냉전 체제하에 사회주의-계획 경제와 민주-자본주의는 서로의 체제가 더 우월하다는 체제 우월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죠. 따라서 덩샤오핑은 정치는 사회주의이면서 경제는 자본주의인 중국의 체제를 ‘중국특색사회주의’라고 명명합니다. 덩샤오핑은 중국특색사회주의가 마르크스에 의해 기초가 놓이고 레닌에 의해 발전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 적용해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르크스의 발전 단계론에 따라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이상사회인 평등 사회를 이루기 위해선 자본주의 단계의 자본 축적 단계가 필요하고 현재의 중국에선 그 물적 조건이 미약하기 때문에 개혁 개방을 통해 경제 발전을 끌어올린 후 평등 사회라는 이상향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 개혁 개방으로 인해 예상되는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중국이 실패하지 않으면서도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유려한 대처라고 생각됩니다.

이로 인해 덩샤오핑의 중국은 서방 국가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성장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덩샤오핑은 이때 ‘도광양회’로 외교에 임하는데요 이 정책 기조는 후에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까지 채택되는 중국의 외교정책 기조가 됩니다. 도광양회는 때가 될 때까지 웅크려서 힘을 기르자는 뜻으로 성장을 위한 기회는 취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자는 것을 뜻합니다. 즉 충분한 힘을 기르기 전까지 성장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천안문 사태

이로 인해 중국은 개혁 개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자본주의 이식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 것인데요 본격적으로 해외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면서 공업은 빠르게 성장하는데 반해 농업은 정체되고 있었고 공업의 성장으로 임금이 인상되고 자연히 사람들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기업의 자유화로 인해 지방관료와 기업가 사이에 결탁이 발생하여 부정 부패가 만연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천안문 사태 당시 탱크맨

여기에 인민들은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며 부패 청산, 언론의 자유, 자유민주주의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중국 당 내에서도 자본주의 이식으로 생기는 문제와 국민들의 요구에 아예 이전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보수파와 더 서구식으로 나아가 해결해야 한다는 개혁파들이 충돌하였고, 개혁파의 대표였던 후야오방이 사망하고 천안문에서 일어난 추모식 시위로 격화되면서 ‘천안문 사태’가 발발합니다.

결국 덩샤오핑은 경제적 개혁과 정치적인 민주화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고 당의 유지와 존속을 선택합니다. 결국 시위대는 무력으로 탄압되었고 이를 목격한 서방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대한 차관 및 투자 동결 등으로 대응하며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킵니다. 이에 덩샤오핑은 남순 강화라는 담화를 통해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데요

남순 강화

남순 강화는 남부의 경제 특구들을 중심으로 덩샤오핑이 순회하며 발표한 담화를 뜻합니다. 덩샤오핑은 담화에서 “자본주의에도 계획 경제가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 경제가 있다”라는 말을 발표하며 자본/사회주의 건 순수 100%는 있을 수 없으며 적당히 공존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남순 강화에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하는데요 하나는 중국은 계속해서 개혁 개방을 할 것이고 중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나 투자를 계속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장쩌민에게 평화롭게 권력을 이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천안문 사태로 인한 정치적 혼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이 퇴진하고 권력을 평화롭게 이양했으니 중국 정치가 다시 안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출처 : 동아일보)

이처럼 덩샤오핑은 여러 굴곡이 있었고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개혁 개방은 초기 시작부분에서 문화 대혁명의 문제 해결이라는 의제에 가려져 치밀한 계획 없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덩샤오핑의 말 “돌다리도 두드려보며 건너면 된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공산당은 문혁 해결을 우선시해 개혁 자체는 점진적인 형태로 진행되게 됩니다.

원로정치 (Gerontocracy)

앞서 덩샤오핑 시기 중국 정치 상황을 보았다면 이번엔 덩샤오핑 시기의 통치 형태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처럼 덩샤오핑은 개혁 조치를 감행하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당의 권한을 축소하며 행정부와 입법부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고 제도화를 통해 공식적인 기구들의 권한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덩샤오핑 정부의 의사결정은 비공식적인 원로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됩니다. 이를 원로정치, 막후 지배라고도 하는데요 전형적인 딥 스테이트(Deep State)로서 원로들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원로들은 과거 혁명 시절을 함께 경험한 혁명 원로를 뜻하는 것인데요 과거 중국의 공산 혁명과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데 동참한 이들이 1970-80년대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이들은 장쩌민의 집단지도체제 이전까지 과도기적으로 존재한 인물들로 핵심인 덩샤오핑을 축으로 한 몸처럼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문혁 시기 덩샤오핑처럼 실권했다가 덩샤오핑의 복귀와 함께 복권된 사람들로 각자 혁명과 건국 과정에서의 명성과 경험을 지닌 인물들입니다. 따라서 이들 간의 인적 네트워크는 상당히 긴밀하며 원로들 간 역할 분담을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덩샤오핑과 예전잉

덩샤오핑은 정치와 외교, 예전잉은 군사 천원과 리셴녠은 경제 등의 분야를 담당했고 중요성이 높은 정책이나 인사 문제는 덩샤오핑을 필수적으로 포함한 원로 회의로 결정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엔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원을 원로 회의가 구성할 정도로 이 시기 국정 운영은 원로들에 의해 돌아갑니다.

베이다이허에서 수영하는 덩샤오핑(오른쪽)

이들은 베이다이허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곤 했는데요 베이다이허는 중국의 지역으로 여름 휴가때 자주 방문하는 여름의 수도로 불립니다. 베이다이허 회의는 전 현직 중국 지도부의 비밀 회의로 일정과 내용 등은 모두 비공개이며 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 현안을 논의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천안문 사건 당시 후야오방의 파면 결정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이처럼 원로 지배는 공식적으로 개혁한 정치구조의 효과를 반감시켰고 전문성이 결여된 원로들이 통치를 하였다는 측면에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여러 개혁 조치들을 통해 현재의 중국을 만든 인물로 회자되지만 한편으로는 원로 정치라는 비공식적 구조를 만들어 사실상 정치 개혁에 대한 효과를 반감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덩샤오핑 시기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원로 정치까지 파악해봤는데요. 다음 포스팅에선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기 중국 정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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